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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뮤지컬 명성황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시씨, 대한제국에는 이 분"

  • 2021-02-07 22:16
  • ACROFAN=류재용
  • jaeyong.ryu@acrofan.com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악극이어서 대중의 기호를 따라 다니는 게 본질적인 속성이다. 생업으로 보자면, 한 두 사람이 하고 마는 일이 아니어서 ‘흥행’이 담보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 때문에 뮤지컬은 흥행을 위해서 창작 시기에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수용하는 게 그 어느 장르보다 급진적인 편이다. 본디 글이나 그림, 사진처럼, 원작자 개인이 그 자신만의 기준으로 딱 짚고 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더, 뮤지컬은 우리가 교양지식으로 아는 내용들과 그걸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충돌하는 테마에 관해서 호오비가 극명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한국에서, 뮤지컬 작품 중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장 도드라지는 걸 손꼽는다면 ‘뮤지컬 명성황후’가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수능시험 때문에 한국사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난감할 정도의 그 무언가다.

▲ 국가주의와 왕정을 싫어하는 공화국 시민들에게 꽤나 취향 타는 작품으로 여겨졌으나. 지금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교해 보다 극을 보면 나름 색다른 재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품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자면,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전자는 해외에 자랑을 대놓고 하게 된 기점이고, 후자는 해외 눈치를 대놓고 보게 된 기점이다. 무언가 해외에 ‘국뽕’을 들이붓고 싶은 마음이 한창 솟아오르던 차에, ‘한국이라서 미안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민주선거로 군사정권 시절도 끊어냈다고 한창 떠들던 때에 후진국에서나 날 사건이라는 것이 연거푸 벌어졌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1994년이 지나고 조국에 대한 자존감이 확 떨어진 시점에, 이 나라 이 민족의 원톱 흑역사인 일제강점기의 그 시작을 테마로 다룬 작품이 ‘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역사적인 고증은 시험답안을 이대로 쓰면 다른 응시자들이 매우 좋아할 그런 차원으로 넘기고, 마치 뮤지컬 ‘엘리자벳’처럼 딱 그 시절 사람들이 열광할만한 이야기로 말이다.

뮤지컬 ‘엘리자벳’과 ‘명성황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대한제국이라는 다른 국가에서, 비슷한 시기에 칼로 암살당한 두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데에서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더 놀라운 공통점은, 뮤지컬 작품들은 각각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는 얻었으나 명사와 사건사고만 따 왔을 뿐 해석은 그야말로 관객 중심으로 짜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배우고 익힐 대상이 아닌, 그냥 재미요소로만 보면 능히 가능한 접근법이고...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 마지막 넘버 하나로는, 우리 조상들이 불쌍해 보이는 걸 넘어서기엔 역부족. 현실세계에서 드디어 역전해낸 국가적 위상에 발맞춰 ‘밸런스 패치’가 순차적으로 있어야 할 듯하다. (제공: 에이콤)

올해가 25주년인데다, 올해 공연은 초연한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공연이어서 스테이지 활용과 씬 구성은 원작에 가장 근접한 형태다. 상당히 시간이 흐른 만큼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첫 시도가 접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대사로도 씬과 씬을 잇게 되었다. 기존에는 노래로만 이어지던 것이었는데, 그런 제약을 벗어나 유기적인 이야기 흐름을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노래로만 구성되었던 관계로, 그간 지적되어 온 문제점이 개연성과 유기성 측면에서 있었다. 음정이 없는 게 더 극 몰입에 유리할 것이라는 평들이 수용된 걸로 보인다. 창작극이므로 유행에 따라 업데이트 되는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공연시간에 어느 정도 가감폭을 줘서 몇 분 가량 짧아지는 경향이 생겼다. 차후에 극을 더 손본다면, ‘인터미션’ 전후의 국체, 즉 ‘조선’일 때와 ‘대한제국’일 때의 차이에 따른 디테일이 더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천세와 만세가 혼재하고, 제국이라면서도 노란색과 보라색이 안 보이는 건 여전히 교통정리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한 해외 관객들에게 보여줄 목적성을 갖고 한국 문화의 클리셰를 있는 대로 다 갖다 넣은 것이 사실인데, 이를 없애고 줄이는 접근보다는, 최근 유튜브에서 인기 끄는 한류 요소들을 수용해 세련되게 다듬는 건 어떨까 하는 그런 욕심도 살짝 생긴다.

올해 버전의 변화가 합당해 보이면서도, 더 어디에선가 바뀔 부분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입장 변화가 가장 크다. 극이 초연된 1995년과 25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을 두고 너무나 큰 우리의 입장 차이가 생겨 버렸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어떻게 나라가 저렇게 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망가지는 통에, 우리나라 국민들의 상대적 자존감이 그 어느 때보다 극대화된 시점이다.

극 초연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은 10년 정도 밖에 잃어버리지 않아 대단했던 때였다. 따라서, 일본은 공사고 낭인들이고 우월적 존재로 다뤄졌고, 확신에 가득 차 별 짓 다하는 게 그들에게는 애국이라는 점이 두드러졌다. 상대적으로 명성황후와 조선 민중들이 불쌍하게 연출되었는데, 아마 차후에 업데이트 된다면 이 밸런스에서 보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구한말 일본제국 신민들이 옆 나라 조선을 어떻게 봐 왔는지, 그 때의 감성으로 지금의 우리가 지금의 일본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40년 이상 잃어버린 나라에서 올림픽도 뜻대로 못하는 저 난맥상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보니, 1995년에 일본을 보던 감성이 이제와 2021년에는 웃푼 일이 되어 버린다. 이게 지금 관객들의 눈높이다.

▲ 25주년 공연이 50주년 기념공연까지 이어지려면, 시대의 변화상과 디테일을 수용하는 창작극 본연의 ‘진화’가 공연계의 미션이겠다 싶다. 당장은 당연히 무리인 거 다 아는 바 겠고. 코로나 19 사태 끝나고 예전의 여유를 되찾은 뒤에 관객들이 원하는 바를 두고두고 줄 수 있는 공연으로 거듭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