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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50줄의 세르반테스가 50줄의 돈키호테에게, 그리고 50줄에 접어든 한 배우에게"

  • 2021-02-07 21:24
  • ACROFAN=류재용
  • jaeyong.ryu@acrofan.com
인류의 평균수명이 마흔 전후이던 시절에, 쉰 넘은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는 쉰 넘었다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겼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50 몇 년 전, ‘맨 오브 라만차’라는 뮤지컬이 탄생했다. 딱 올해, 지금 현 시점에서 볼 때, 참으로 50줄과 인연 많은 이야기인 셈이랄까?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고요히 사색해 봐도, 이젠 10년 전 일은 가물가물. 까마귀 고기 탓이나 하는 하릴없는 인생이어도, 10년의 다섯 배를 넘어선 시간이라면, 당연히 그 사이에는 별 일이 다 있는 법이라 자문자답 할만하다. 그 50이란 햇수를 드라마와 영화 버금갔을 인생을 살아낸 이가 작정하고 글로 쓴 고전은, 시대를 관통하는 울림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문호 소리 듣는 사람 치고 인생이 인간적으로 마구 꼬이지 않은 사람 없는 법이라, 세르반테스 인생역정은 위키피디아에서 조금만 읽어 봐도 ‘인간적으로’ 대문호 안하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길이다. 그런 인생 50 몇 년이, 쉰 넘은 돈키호테로 반영된 것은 어찌 보면 운명. 시로 노래로 남은 ‘The Impossible Dream’은 글로든 노래로든 수백 년 시간을 넘어서도 여전히 우리를 울리고 있다.

▲ ‘세르반테스&돈키호테’역을 맡은 류정한, 조승우, 홍광호 (좌우 순, 제공 : 오디컴퍼니㈜)

그렇게 50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작품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 가장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에 가까운 캐스팅이 떴다. 1971년 생 류정한 배우가 세르반테스 겸 돈키호테로 분하면서다. 400여 년 전 ‘50’과 여든은 넘어야 은퇴한다는 요즘의 ‘50’이 어디 같겠는가 싶지만, 예나 지금이나 시간의 축적은 한 개인에게 숙명이든지 운명이든지를 접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숫자다.

50이라는 숫자 위에, 세르반테스는 대문호로, 돈키호테는 캐릭터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류정한 배우 역시, 50여년의 삶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뮤지컬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더 트리플 캐스팅 중에서 가장 연장자의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원작이고 개작이고 ‘50’이라는 숫자가 너무 돋보여서다. 작가의 삶과 시공간이 다르다곤 해도, 그 정도 시간을 살아온 한 사람의 연기가 아무래도 특별한 가치로 보였다고나 할까.

공연계 현실을 본다면, 마흔 중반을 넘어서면 직접 연기를 하기 보다는 제작이나 고문으로 달리 가는 루트가 통상적이다. 앞서 개막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처럼 신진 배우들을 리드하느랴 프로듀서가 직접 나서기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 역시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지천명을 넘어서도 노래까지 다 하는 뮤지컬 연기라면, 피지컬 관리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닌 법. 류정한 배우는 이처럼 다방면에서 괄목할만한 족적을 현재 진행형으로 남기고 있어, 그런 그가 50줄 넘은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모두에 분한다는 건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 지금 살아 있는 그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지금 이 시기를 극복하고자 모인 모든 배우들에게 축복을.

뮤지컬의 원작인 ‘돈키호테’의 창작 배경은 뮤지컬의 극중 배경과 겹친다. 그라나다에서 세무징수원으로 일하다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 동안에 구상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뮤지컬 이전, 연극으로 극화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프레임이 바로 이 시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극중극’ 이면서도, 후대의 극작가들이 위대한 대문호에 대한 헌사로서의 구성을 취하고 있음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리 쓰여져 스테이지에 오른 초연이 1964년이니, 올해 기준으로 따져보면 어언 57년 전. 그 긴 시간 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뮤지컬이 공연되었고, 극화를 다른 형태로 손봐 영화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관객과 시청자들을 만나 왔다. 그 바람에 유튜브에서 검색만 해봐도 수많은 버전의 넘버와 트레일러들을 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 찾아 볼 수 있는 영상들 중에서는 참 잘 부른다 싶은 것도, 왜 저러나 싶은 것도 혼재해 있다. 물론, 배우들의 노력이 끝이 없단 건 잘 알지만, 취향 따라 가는 건 불문가지. 은근히 그래서 더 극 해석과 연기에서 지천명의 배우가 어이 할지 궁금했었다. 짜여진 스테이지와 정해진 넘버 속에서, 그만의 것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듣고 싶었던 결론은 단순하다. 노래 따라가는 인생이, 넘버에 어떤 악센트를 남기는지. 쉽게 풀이하자면, 유행가 가사를 단순히 가수 따라 잘 부르기 보단 어느 단어에선가 힘주어 부르는지가 있는, 그게 들리는 시기가 있다. 뮤지컬 넘버에서 배우의 기량을 따진다기 보다, 자신을 어디에 투영하는지를 체크하는 포인트랄까? 아무래도 ‘50’이라는 상징에 홀려 캐스팅을 고르다보면 그런 데에 괜히 연연하게 되었다.

▲ 물리적으로 반 밖에 채울 수밖에 없는 객석처럼 허전한 게 또 있을까 싶지만서도. 그럼에도 이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는데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왜 뮤지컬을 연식 별로 계속 다 따로 보고, 우리가 왜 멀티 캐스팅을 다 따로 보고, 우리가 왜 특정 배우 공연을 거듭해 보는가 하는, 아직은 뮤지컬(의 재미를 바로) 안 보는 이들이 묻는 그런 류의 질문의 근거? 그런 거가 아닐까 싶다. 사실 작품이란 것이야, 극작가가 포맷을 정해둔 것이고, 그걸 초월해 내는 의무는 연기자에게 있는 관계로.

그 폭발력을 보고 싶어 사람과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거 아닐까 하는 나름의 답을 갖고는 있지만 그게 꼭 남들에게 강요할 수만은 없는 개인적인 취향 그 정도로도 정의하는 게 맞지 않는가 싶어 꼭 도드라져 어이해라 마라 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래서 결론은 만족. ‘바람의 노래’에서 “사랑이”에 악센트가 박히고, ‘안동역에서’에서 “오지 않는 사람아, 대답 없는 사람아”에 악센트가 박히는 게 자연스런 나이가 되고 보니, 류정한 배우가 앞으로도 극으로 관객을 만나고픈 마음이 충분히 전해지는 것 역시 느껴지게 되더라 싶다. 스스로도, (코로나 19 사태로 이런저런 어려운 일 겪으며 인성 참 차가워졌다 싶던 차에) 아직은 배우가 전하고픈 느낌이 연기든 노래든 아직은 마음에 느낌으로 전해진다 싶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고.